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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밀롱가에 대한 갈증 - 첫번째 이야기Tango 2019. 4. 17. 12:30
어느덧 땅고와 함께 한지 4년이라는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다. 다양한 밀롱가를 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며 지냈던 시절이 나에게도 존재한다. 어느 밀롱가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어느 DJ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던 때에는 밀롱가를 가기 전부터 설렘을 가득 품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밀롱가에 도착을 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춤을 시작하고 싶었고, 나에게 다가올 즐거움이라는 선물을 기다리며 참는 것이 어려웠던 적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땅고는 자연스럽게 나의 삶에 녹아들었고, 익숙해지면서 기다리면서 느끼는 설렘과 그 공간에서 함께 하며 느끼는 행복의 정도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강렬한 감정들이 줄어들면서 남는 것이라고는 땅고라는 춤에 대한 탐구심 뿐이었다. 땅고라는 것이 너무 좋고, 그것과 인생을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이기 때문에 즐거움이 쉬이 줄어들더라도 쉽게 땅고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더 몸을 잘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더 걸음이 다채로워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더 안기가 편안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더 상대와 하나가 된 듯 춤을 출 수 있을까?'
공부하듯, 또 연구하듯이 밀롱가에서 사람들의 춤을 탐구하고 나의 몸을 시험에 보는 것은 물론 재미있다. 하지만 땅고라는 문화를 처음 받아들일 때 느꼈던 강렬한 감정과는 괴리가 크다. 나의 춤과 몸에 대한 탐구는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필연적으로 자괴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습을 하는데도 어째서 사람들은 나와 춤을 추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나의 안기가 얼마나 불편하길래 같이 춤추는 그/그녀가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일까?'
'나의 몸은 어째서 그/그녀와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나의 걷기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엉망인가?'
사소한 질문들로 시작되는 철저한 자기비판과 반성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땅고라는 문화 안에서의 자기비판과 반성은 단기간의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왜냐? 아무리해도 나아지지 않으니까! 쉽게 고쳐지지 않으니까! 아주 긴 시간의 고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계속되는 자기비판과 반성의 굴레는 땅게로스를 우울하게 한다. 밀롱가라는 곳은 자신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비판과 반성의 장소가 될 뿐이다. 습관처럼 발길은 밀롱가로 향하겠지만 채워지지 않는 필연적 결핍을 마음 속에 간직한 채로 고통을 감내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의 완성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춤을 홀린 듯이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그들의 마음 속은 어두워지게 된다.
같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댄서들과 어둠 속에서 이를 바라보는 이들, 우울한 써커스 나는 그런 우울한 과정의 시발점이 현재 밀롱가의 엄격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배려하고 그에 따라 서로에 대한 존중을 각자가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엄격한 분위기는 밀롱가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상대의 시선과 평가을 의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세상의 다양한 것들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개개인들은 모두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는 올바르지 못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밀롱가라는 곳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배려는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에서든지 극단적인 엄격함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나는 밀롱가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말이라는 것은 나를 떠나는 순간부터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기가 가장 쉬운 것 중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말만 그렇겠는가? 음주의 여부를 따지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음주의 범주 안에서도 양주는 되고 막걸리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을 것이다. 밀롱가를 오기 전 저녁 식사 메뉴 선정에 대한 평가도 서슴없이 내리는 곳이 밀롱가라는 엄격한 공간이다.
그러한 공간에서 순수하게 땅고를 즐기기만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어떤 정신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멘탈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내버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마음으로 밀롱가에 당당히 자리잡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결국 언젠가는 사람들의 시선과 가치판단에 어울리는 춤, 용모, 인성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게 과연 옳은 것일까? 그게 과연 땅고가 맞는 것일까?
과학은 자연계를 연구하고, 공학은 그것들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낸다. 그래서 우주가 정해놓은 룰에 맞추어 연구하고 공부하는 방법 외에는 인간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문화와 예술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고 인간이 느끼는 일이 아니던가? 그 안에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서 인간의 감정과 창의성을 억누르는 행위가 가장 비판받아야 하는 일이 아니던가? 땅고를 예술이자 문화로서 받아들이게 될수록 자유로운 밀롱가에 대해 갈증을 느끼게 되었다.
춤추는 이들이 가장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타인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밀롱가.
자유로운 밀롱가에 대한 갈증.
마침.
- Philos -
P.S.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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